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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으실 본문은 민수기 1장 1절에서 시작합니다. (현재 '원문순서'입니다.)
헤롯(Herod)
BC 55-AD 93년경까지 로마 황제를 대신하여 팔레스타인과 그 인접 지역을 다스리던 이두메 왕조의 왕들을 말한다. BC 1세기 초 알렉산더 얀네스(Alexander Jannes)에 의해 안티파테르(Antipater) 1세가 이두메의 통치자로 임명되면서 이두메 왕조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안티파스(Antipas, 안디바) 2세가 BC 47년 율리우스 케사르에 의해 유다 총독으로 임명되어 유다 지역을 다스리면서 헤롯 왕가의 통치가 시작되었다. 그는 한 아들인 파사엘에게는 예루살렘을 통치하도록 하였고 헤롯(헤롯대왕)에게는 갈릴리 총독 자리를 주었다.
헤롯 대왕(Herod the Great): 유아살해 명령을 내린 왕
안티파스 2세의 둘째 아들로 BC 47년, 25세의 나이에 갈릴리 지역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갈릴리 지역의 도둑떼를 소탕하며 하스몬 왕가의 안티고누스(Antigonus)가 갈릴리를 침입하였을 때도 그들을 물리치는 등 정치적인 능력이 뛰어났다. 아버지 안티파스가 암살당한 후 형 파사엘과 함께 유다의 분봉왕으로 임명되었으며 BC 40년에는 로마 황제 아구스도에 의해 유대인의 왕으로 임명되었다. BC 37년이 되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있던 파르티아 군대와 안티고누스 왕을 물리치고 유대인의 왕위를 얻게 되었다.
헤롯은 로마 정부와 유대인들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등 왕으로서의 정치적 수완을 보여 주었다. 지중해 연안에 항구 도시를 만들어 가이사 아구스도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가이사랴라고 칭하기도 했으며, 사마리아와 여리고 같은 도시들을 재건하였고, 헬라 양식의 극장이나 원형 경기장 등과 같은 건축 사업도 활발히 수행하였다. BC 20년에는 예루살렘 성전 재건 사업을 시작하였는데 헤롯 성전이라고 불리는 이 성전은 그가 죽은 후 68년경에 완성되었다.
헤롯은 순수한 유대인은 아니었다. 에돔 출신으로 선조가 개종하여 유대인이 된 반쪽짜리 유대인이었다. 그래서 그는 하스몬 왕가의 딸 마리암네와 결혼하여 유대인의 환심을 사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아주 잔혹하여 자신의 왕권을 노린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가족도 예외없이 처단하였다. 그는 왕비 미리암의 남동생 아리스토불루스, 할아버지, 어머니, 왕비 미리암, 미리암의 두 아들을 차례로 죽였다.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듣고 자신의 왕위를 지키기 위해 유아 살해 명령을 내리는 잔인함도 보였다(마 2:16-18).
헤롯은 자신이 죽은 후 국가적인 애도 기간을 확실히 하고자 여리고에 있는 경기장에서 유대인 지도자들을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BC 4년에 70세의 나이로 죽었다.
헤롯 안디바(안티파스): 세례 요한을 처형한 왕
헤롯 대왕의 둘째 아들로 헤롯이 죽자 갈릴리와 베뢰아의 분봉왕이 되어 BC 4-AD 39년까지 다스렸다(눅 3:1). 성경에는 분봉왕 헤롯, 헤롯 왕으로 나온다(마 14:1; 막 6:14; 눅 3:19).
그는 첫 번째 아내와 이혼하고 자신의 이복 형제인 빌립(헤롯 2세)의 아내이자 자신의 조카인 헤로디아와 다시 결혼하였다. 이것 때문에 세례 요한의 책망을 받게 되자(막 6:18) 그는 세례 요한을 옥에 가두었다(막 6:17). 헤롯은 세례 요한을 두려워하여 죽이지 못하다가 생일 잔치 자리에서 헤로디아의 딸의 요청을 듣고 세례 요한의 목을 베고 말았다(막 6:20-29).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여우라는 말을 들었는데(눅 13:32) 이는 협박과 속임수에 능한 헤롯의 간사함과 교활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헤롯은 빌라도에 의해 호송되어온 예수님을 재판하였는데 예수님을 업신여기며 희롱한 후 다시 빌라도에게 넘겨 주었다(눅 23:7-11). 그는 갈릴리 해안에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Tiberius)의 이름을 따라 디베랴라는 도시를 건설하였으며 갈릴리 바다도 디베랴 바다라고 불렀다.
헤롯 아그립바 1세: 야고보 사도를 죽인 왕
헤롯 대왕의 손자이며 아리스토불루스의 아들이다. 헤로디아의 형제이며 헤롯 안디바의 조카이기도 하다. 성경에서는 헤롯 왕으로 나온다(행 12:1).
그는 로마 황실에서 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글라우디오(Claudius)가 로마 황제로 등극하는 데 공헌하여 유대와 사마리아를 통치할 권한을 부여받게 되었다. 또한 유대인의 환심을 사고자 율법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여 지성소에 황제의 상을 세우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사도행전 12장에 나오는 것처럼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죽였으며(행 12:2) 베드로를 옥에 가두는(행 12:3-5) 등 기독교인들을 핍박하였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 교만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고 말았다(행 12:23).
헤롯 아그립바 2세: 사도 바울을 재판한 왕
아그립바 1세의 아들이다. 그의 아버지가 죽었을 때는 17살의 어린 나이여서 부친이 다스리던 지역은 로마 총독이 다스리게 되었다. AD 50년에 칼키스(Chalcis)의 지역을 다스리는 왕이 되었으며 후에 갈릴리 지방의 분봉왕이 되었다. 그는 누이 버니게와의 근친 상간을 범하여 유대인들에게 지지를 받지 못했다. 가이사랴의 베스도에게 문안하러 갔을 때 구류되어 있는 사도 바울을 보게 되었으며(행 25:13-22) 바울의 변증을 듣게 되었다(행 26:1-29). 그는 바울의 변론을 듣고 바울에게서 죄를 찾을 수 없었지만 가이사에게 호소하였기 때문에 석방시킬 수 없다고 말하였다(행 26:30-32). 헤롯 왕가의 마지막 통치자로 70년 예루살렘이 정복되었을 때 로마로 가서 로마의 행정관이 되었으며 100년경에 죽었다.
출처:두란노 비전성경사전
무교절(無酵節, Feast of Unleavened Bread)
유월절이 시작되는 저녁부터 7일 동안 무교병을 먹으며 지키는 절기를 말한다(출 12:15-20). 무교절과 유월절은 대개 구분없이 한 절기로, 엄밀하게 따지면 유월절은 아빕월(태양력 3-4월) 14일 저녁 어린 양 희생제사만을 가리키는 것이고 무교절은 유월절을 포함하여 일주일 동안 누룩없는 빵인 무교병을 먹으며 지키는 절기를 말한다.
무교절은 출애굽의 구원을 기념하며 감사하는 절기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 40년 동안에도 이 절기를 지켰고(출 23:15; 34:18)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계속 지켰다(수 5:11; 삿 6:19; 삼상 28:24; 왕하 23:9; 대상 23:29; 대하 8:13; 30:13-25; 스 6:22). 예수님과 그 당시도 지켰고(마 26:17; 막 14:1, 12; 눅 22:1, 7) 사도들 당시에도 지켰다(행 12:3; 20:6).
무교절에 해야 하는 일:
무교절에는 누룩을 집에서 없애야 했다(출 12:19). 그래서 누룩없는 무교병을 먹지 않고 유교병을 먹을 경우 하나님 앞에서 불결하고 거룩하지 못하기 때문에 백성 중에서 끊어지는 벌을 받았다(출 12:15, 19). 첫 날과 일곱째 날은 성회로 모였으며 노동을 금하였다(출 12:16; 레 23:7-8; 민 28:18, 25). 성회로 모일 때(민 28:17-25)는 흠없는 수송아지 2마리, 수양 1마리, 일년 된 숫양 7마리를 번제로 드렸으며 소제는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어 드렸다. 또 속죄제물로 수염소 1마리를 상번제 외에 드렸다.
출처:두란노 비전성경사전
성경은 사도들의 죽음을 기록하고 있는가?
출처 : https://www.gotquestions.org/Korean/Korean-death-apostles.html [원문보기]
다음은 원문의 내용을 요약/편집한 것입니다.
질문: 성경은 사도들의 죽음을 기록하고 있는가?
답변:
성경은 오직 야고보 사도의 죽음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행 12:2). 헤롯 왕이 야고보 사도를 “칼로 죽였다”고 하는데 아마 참수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다른 사도들이 죽음을 맞이한 상황들은 교회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이야기들과 관련이 있지만 우리는 이런 설명들에 대해 너무 많은 무게를 두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예언(요 21:18~19)의 성취로서 로마에서 십자가에서 거꾸로 매달려 처형되었습니다.
마태 사도는 에디오피아에서 칼에 맞은 부상 때문에 고통 받으며 순교했습니다.
요한 사도는은 로마의 박해의 물결이 있는 동안 기름이 끓는 큰 가마솥에 처해져서 순교를 맞이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적적으로 죽음을 면했습니다. 그 후 요한 사도는 밧모섬에 있는 광물을 캐는 감옥에서 형벌을 받았습니다. 그는 밧모섬에서 요한계시록을 썼습니다. 나중에 요한 사도는 자유롭게 되어 지금 현재의 터키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늙어서 죽었는데, 평화롭게 죽은 유일한 사도입니다.
예수님의 형제인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였습니다. 그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끝까지 부인하지 않자 성전의 남동 쪽 꼭대기(약 30미터의 상공)에서 던져졌습니다. 그가 추락 후에도 죽지 않은 것을 발견하고는 곤봉으로 때려서 죽였습니다. 이 꼭대기는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할 때 데리고 갔던 곳으로 여겨집니다.
나다니엘이라고도 알려진 바돌로매 사도는 아시아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오늘날의 터기에서 예수님을 증거하였고 아르메니아에서 설교하다가 순교하였는데, 살이 벗겨지도록 죽을 때까지 채찍에 맞았습니다.
안드레 사도는 그리스에서 (X)자 모양의 십자가에 처형되었습니다. 일곱 명의 군사들이 그를 심하게 채찍질을 한 후, 극도의 고통을 연장시키기 위해 끈으로 그의 몸을 십자가에 묶었습니다. 그의 제자들은 안드레 사도가 십자가로 이끌릴 때 다음과 같은 말을 하며 반겼다고 보고하였습니다. “나는 오랫동안 이 행복한 순간을 바라고 기다렸습니다. 십자가는 거기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몸에 의해 거룩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이틀 동안 그를 고문하는 사람들에게 계속 설교했습니다.
도마 사도는 인도에 교회를 세우기 위해 여러 차례 선교 여행을 하다가 어느 날 거기에서 창에 찔려 죽었습니다.
배신자 유다 사도를 대신해서 선택된 맛디아 사도는 돌에 맞고 참수되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주후 67년에 로마의 악한 황제인 네로에 의해서 고문 당하고 참수되었습니다.
사도들이 어떻게 죽었는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도들 모두가 믿음을 위해 기꺼이 죽으려 했다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제자들도 그 사실을 알았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거짓으로 알고 있는 어떤 것을 위해 죽지 않을 것입니다. 사도 모두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기를 거부하고 끔찍한 죽음을 기꺼이 맞이하려 했다는 사실은, 그들이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했었다는 엄청난 증거가 됩니다.
출처 : https://www.gotquestions.org/Korean/Korean-death-apostles.html [원문보기]
29% (사도행전)
0% (전체)
[지도] 바울 사도의 1차, 2차, 3차, 로마행 전도 여행
누가는 데오빌로에게 '그 배운 바와 확실함을 알게 하려고'(누가복음 1:4)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했습니다.
데오빌로는 기독교로 개종한 이방인인데, 누가는 데오빌로로 대표되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교에 관한 보다 성숙한 가르침을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누가(Luke)
『인명』 <누가복음>ㆍ<사도행전>의 저자(?~?). 그리스의 의사로, 바울 사도의 동역자가 되어 여러 차례에 걸친 전도 여행에 그를 따라다녔다
출처: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성경 기록자로서의 누가
여러 정황을 미루어 볼 때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동일 인물에 의해 쓰여졌으며(눅 1:1-4; 행 1:1), 그는 바울 사도의 전도 여행에 함께 참여했던 동역자 누가였음이 분명하다(몬 24). 초대교회와 교부들(이레니우스, 순교자 저스틴, 클레멘트, 오리겐, 터툴리안 등)도 골로새서 4:14과 디모데후서 4:11 및 빌레몬서 24절에 나오는 의사 누가가 이 두 책의 저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한편 성경 기록자 누가는 이방인이었다. 그 근거로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인용된 구약의 본문들은 모두 히브리 원문에서가 아니라 70인역에서 인용된 것이며, 또한 누가복음서에서 주님(Lord)이라는 말이 ‘랍비’로 되어 있지 않고 헬라어 명칭인 ‘디다스칼로스’(didaskalos; 선생)와 ‘에피스타테스’(epistates; 主, Master)로 되어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마태나 마가와는 달리 예수님이 하신 말씀 가운데 아람어를 사용하신 것을 기록하고 있지 않으며, 특히 유대인들에게서 흔히 발견하게 되는 배타주의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골로새서 4:10-14에서 바울 사도는 그의 동역자 가운데 아리스다고, 바나바의 생질 마가, 유스도라 하는 예수만이 유대인이었다고 말하고 난 후에 누가의 문안을 전함으로써 누가가 이방인 신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누가는 신약성경의 저자들 가운데 유일한 이방인 저자인 셈이다.
의사로서의 누가
누가가 의사였다는 것은 바울 사도가 골로새 성도들에게 문안하는 편지에서 ‘사랑을 받는 의원 누가’라고 표현한 것에서 알 수 있으며(골 4:14),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나타난 의학 용어들을 살펴볼 때 그의 직업을 짐작할 수 있다(눅 4:48; 8:55; 행 28:8-9 등). 또한 바울 사도의 편지들을 볼 때 누가가 골로새 교회와 안면이 있었고, 빌레몬이나 디모데와도 친분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딤후 4:11).
누가는 바울 사도가 두 번에 걸쳐 로마 감옥에 투옥되었을 때도 빠짐없이 동행했는데(딤후 4:11), 특히 주의를 기울여야 할 점은 누가가 바울 사도에게 ‘사랑을 받는 의사’였다는 것이다(골 4:14).
출처:두란노 비전성경사전
‘사도들의 행적’이란 뜻을 지닌 신약 성경의 다섯 번째 성경입니다. 어떤 사본에는 단순히 ‘행적’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사도들과 사람들에 의해 예루살렘(행 1:1-7:60)에서부터 시작하여 유대와 사마리아(행 8:1-12:25)를 거쳐 이방 세계인 로마, 땅 끝까지(행 13:1-28:31) 전파되는 선교 역사를 기록한 책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은 선교행전이라고도 불립니다.
또한 복음은 사도들과 성도들에 의해 전파되었지만 이를 추진하는 원동력이 성령이라는 사실로써 사도행전은 성령행전이라고도 불립니다(행 2:1-13; 4:23-31; 5:1-11; 8:14-17; 10:44-48; 16:6-7; 19:1-6; 20:22-23, 28).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성령님이 오셨습니다.
성령님과 함께 하는 사도들의 복음전파가 시작 됩니다.
[표] 사도행전 권 구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