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 사도가 개척한 데살로니가 교회는 기독교 복음에 대해 적대적인 분위기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은 사회적 불이익과 온갖 핍박을 당하지 않으면 안되었기에 바울 사도는 심히 불안하였습니다. 그 교회 교인들은 대부분 초신자들이었기 때문에 바울 사도는 그들의 신앙의 원리를 정립시켜 주고 바른 신앙생활을 하게 해줄 목적으로 이 편지를 썼습니다.
바울(Paul)
『인명』 기독교 최초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한 전도자(?~?). 열렬한 유대교도로서, 기독교도를 박해하러 가다가 다메섹에서 예수의 음성을 듣고 믿음을 바꾸어 전 생애를 전도에 힘쓰고 각지에 교회를 세웠다. 로마에서 순교하였으며, <로마서>ㆍ<고린도서>ㆍ<갈라디아서> 따위를 썼다.
출처: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의 의미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공헌을 한 신약 시대의 인물이다. “대머리와 휜 다리에 눈썹은 서로 맞닿고 코는 매부리에 단신의 다부진 체구를 가진 호감에 찬 사나이, 그는 인간의 모습에 천사의 얼굴을 가진 자이다.” 이것이 2세기 ‘바울과 테크라의 행적’(The Acts of Paul and Thecla)이라는 한 외경에 묘사된 바울의 인물 스케치이다.
한때는 기독교의 핍박자였던 그가 다메섹에서의 회심을 통해 신약성경의 방대한 부분을 기록한 성경의 저자요 위대한 신학자로, 노련한 목회자요 설교자로, 또 유대인 공동체의 울타리를 넘어 이방 세계로 나아간 선교사가 된 그의 삶 자체가 하나의 메시지다.
바울 사도는 다소 출신이었다(행 9:11; 22:3). 로마 시민권을 가졌던 유대인 바울 사도는 다소의 이상적인 교육환경 속에서 자랐다(행 22:3). 다소는 동방의 사상, 종교와 서방의 문화, 학문이 어우러졌던 곳이다. 또한 바울 사도는 원래 천막 제조업을 했는데(행 18:3), 율법 공부 외에도 자활의 수단으로 이용할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길리기아 지방에서는 길리기움(cilicium)이라는 산양털로 만든 직물이 생산되었으며, 바울 사도는 이것으로 천막을 만들었을 것이다. 안디옥 교회에 파송되었던 바나바 사도는 이방 선교를 위해 바울 사도를 찾아 다소를 방문했던 적이 있다(행 11:25).
출처:두란노 비전성경사전
데살로니가전서(1 Thessalonians) 기록 장소, 연대, 배경 및 목적
데살로니가전서는 바울 사도가 초기에 쓴 서신(다수 학자들은 데살로니가전서를 바울 사도의 첫 번째 저작이라고 본다)으로, AD 51-52년경 고린도에서 썼다. 제2차 전도여행 중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했던 바울 사도와 실라는 그들을 시기한 유대인들의 박해로 인해 데살로니가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행 17:1-9).
그 후 고린도에서 바울 사도는 디모데가 전하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소식을 들었다. 세워진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데살로니가 교회는 모진 박해를 잘 견디고 있으며 다른 지방에까지 그 믿음이 본이 되고 있고(살전 1:2-10; 2:14-16), 바울 사도를 보고 싶어한다는 기쁜 내용이었다(살전 3:6).
아울러 바울 사도는 자신의 지도가 필요한 몇 가지 문제가 있음도 발견했다. 즉 회심한 성도들 중 그릇된 종말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이 있고(살전 4:11-12), 일부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기 전에 죽은 사랑하는 성도들의 영원한 장래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살전 4:13-18). 또 성도덕의 문제를 지닌 성도들도 있었다(살전 4:1-6).
바울 사도는 반대자들이 자신의 사역과 인격을 비방하는 것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밝힐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감사하며,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 지도하고 해답을 주고자 데살로니가전서를 기록했다.
바울 사도가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과 모범에 감사하며 그곳에서의 사역을 회고 하였습니다. 또한 한번 더 방문하고 싶다고 말하였습니다.
더불어 예수님의 재림을 설명하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바라시는 생활을 부탁하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표] 데살로니가전서 권 구성
11% (데살로니가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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