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을 생각한다
김용철 씀
펴낸곳 : 사회평론
펴낸날 : 2010-01-29
저자 서문
지식과 경륜이 글을 쓰기에는 너무 미흡하고 게으른 탓에 미루고 미루다, 온 나라를 1년여 동안 소란스럽게 한 일에 대하여 어떤 형식으로든 정리해야 한다는 지인들의 권고로 의무감을 느껴 어렵게 쓰게 되었다.
그런 까닭에, 이 글은 고백록이나 고발서가 아니며 백서도 아니고 오히려 그들 모두이다.
이건희 씨 일가와 가신들이 국가적, 사회적 기능을 오도하고 있는 문제는 거대한 비자금을 조성하고, 그 중 극히 일부를 국가, 사회의 각 분야에 던져주어 부패시킴으로써 공적 기능을 무력화하고 나머지 비자금 대부분을 자신들의 영속불변의 부당한 권력체계를 유지하고 확대하는 데 사용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그런데 이런 내용 가운데 대부분이 수사 및 재판 등 공적인 검증절차를 거치며 근거 없는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소설가 이병주는 과거가 "햇볕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라고 말했다. 내가 삼성에서 보고 듣고 겪은 이야기들은 역사도, 신화도 아닌 야사로만 전해지게 됐다.
물론, 이씨 일가가 저지른 일부 조세포탈과 배임에 대해서는 유죄가 확정됐다. 이에 대해 형식적인 처벌이 이루어졌으나, 이 또한 불과 4개월여 만에 대통령 특별사면이 이루어졌다. 다만 묘한 것은 주범은 사면됐는데 종범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씨 일가에 대한 처벌을 반대하는 이들은 흔히 자신들을 보수 세력이 부른다. 그러나 세금을 제대로 내지 않고, 병역을 기피하는 보수 세력이 있다는 말을 나는 들어본 적이 없다. 보수는 기존 체제를 지키려 든다는 뜻인데 납세와 병역은 체제 유지를 위한 필수조건이다. 이런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자들이 보수를 자처하는 것은 더 많은 이익을 챙기려는 몸부림일 뿐, 진정한 보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2007년 가을 이후 진행된 논란의 와중에서 주요 언론과 상당수 시민들은 의도적으로 또는 분별력이 부족하여 보라는 달은 보지 않고 가리키는 내 손가락만 못생겼다고 탓하였다.
이는 저들이 뿌린 수십 쪽에 이르는 문서와 음해를 통한 공작의 결과이기도 하다. 이 글이 공식적인 마지막 기회일 수 도 있으니, 온갖 음해에 대해 모두 해명하거나 반박하라는 권고가 있었으나 역시 적극적인 변명을 하지 않기로 했다. 이미 저지른 과오에 대하여 처벌을 감수하기로 한 사람이 사적인 문제에 대하여 공적으로 변명하는 것이 어색한 탓이다.
많은 이들이 나의 경제적 문제와 가정사에 관심을 갖고 있는데, 공동체에 해악을 끼친 바도 없고 앞으로도 영향 미칠 일이 없는 사람의 사적인 내용을 공개하여 가까운 이들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 나는 너무 싫다. 다만 삼성 측이 주장하는 돈의 반이 안 되는 돈을 보수로 받아 사치 생활과 기부, 친족 지원 등으로 대부분 소비한 것은 사실이고, 이는 본문에서 설명하였다. 수입 범위 내의 소비에 대하여 사치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지 않지만, 굳이 사치라는 단어를 쓴 것은 지금 생각하면 더 나은 소비방법이 있었는데 당시에는 깨닫지 못했음을 한탄한다는 뜻이다.
보는 사람의 처지에 따라 살인이 의거가 되고, 대량학살이 위대한 정복이 된다. 나의 문제제기를 배신이라고 여기는 사람이라면, 그는 배신당한 사람의 입장에 선 것이니 내가 어찌할 도리가 없다.
함세웅, 전종훈, 김인국, 김영식, 나승구, 배인호, 김진화, 맹제영, 이영선, 고정배, 안승길 신부 등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김영희, 이덕우 변호사, 경제개혁연대 김상조 소장, 민변의 백승헌 회장, 곽노현, 김기원 교수, 본분을 지키려 한 언론인들, 나를 지지해준 학자, 학생, 회사원, 시민들, 친구들과 가족, 모두에게 진 빚을 갚을 방도가 없어 안타깝다.
이 글을 정리하느라 고생한 <프레시안>의 성현석 기자에게 고마움을 밝혀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