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눈 먼 이가 보는 이를 위로 했다
지은이 : 서덕석
펴낸곳 : 나눔사, 1989-12-30
서덕석
서덕석은 1957년 경남 진양에서 태어났다. 어릴적에 앓은 열병으로 청각 및 언어장애를 가졌으며, 한 때 고향에서 농사를 짓다가 1978년에 성남으로 옮겨 공장 노동, 공사판 인부생활을 했다.
진주 농림전문대학을 거쳐 서울 장로회신학교, 장로회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올 봄에 목사가 되었다.
지금은 성남시 상대원에 노동자교회를 세우고 노동자 선교에 힘쓰고 있다.
제1회 전국대학생 기독교문학상, 5월 문학상, 시입상, 시묶음 [나는 너를 모른다]를 펴냄 (1985)
서덕석의 시 속에는 예수가 살아 움직인다. 고난의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와 더불어 현대적 육화를 이룬 예수의 살과 피가 생생하게 튀고 꿈틀거리는 것이다.
그는 구체적인 현실과 역사 앞에 항시 마주서고 있다. 그래서 그의 리얼리티는 역사의식 또는 사회의식과 관련하여 얻어진 그 무엇이다. 현실 인식이 뚜렷한 이만이 생산해 낼 수 있는 그런 시를 그는 쓰고 있다.
- 임영천 (목사, 조선대국문학교수)
때로는 눈 먼 이가 보는 이를 위로 했다
자네는 늘 상 그 모양일세
혼자서 천국을 독차지 하고
예수의 어깨위에 떨어진 비듬까지 보면서
느긋하게 구원의 즐거움을 만끽하지만
길섶에 돋아난 제비꽃을 보고
부끄러운 꽃송이를 만드신
하느님의 뜻을 헤아릴 수 있나.
이 세상 모든 것을 가졌다는 왕도
만족케 해 드리지 못한 하느님을
빌어먹던 한 거지가 죽어가면서
참으로 기쁘게 해 드린 사실과
하나같이 못나고
소외되고 가난한 죄인들이
예수와 함께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나.
자네는 저 하늘 높은 곳에 계신
눈부시게 빛나는 하느님만 바라보다가
땅위에서 초라하게
고난 당하는 하느님은
어째 보지 못하나.
낯 익은 예수만 따라가다가
다른 모습의 예수는 몰라보는게 아닌가
나는 볼 수 없는 대신에
그 분의 숨소리를 듣네만
그래도 절망은 말게
자네가 그 분을 찾으려고 휘둘러 보면
언제나 가까이
옆에 계실 것이니.
나는 너를 모른다
-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라 하리라 - 마태복음 7:22~23.
그때 너는 거기에 없었다
내가 이세상의 가장 밑바닥에서 신음하고
꼴찌의 비애를 씹으며
일마다 죽을 쑤어
되는 것 하나 없이 참담했을 때,
죽는 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너는 함께 있어 주지 않았다.
석달 치 밀린 월급을 못 받아
생라면 한 봉지로 하루를 버티고
버스표도 없이 오도가도 못할 때,
엄동설한에 싸아한 가스를 들이마시며
언 몸을 녹일 화덕에
갈아넣을 연탄 한장 없을 때
너는 나를 돌아보지 않았다.
삶의 터전이 송두리째 뿌리 뽑혀
비오는 길거리로 내어 몰리는
전쟁터 같은 철거민촌이나
우리 손으로 세운 노동조합을 지키자며
밤새워 악을 쓰고 노래 부르던
그 농성장에도
너는 코빼기를 내밀지 않았다.
내가 이 시대의 아픔을 껴안고
목청껏 외치다가
무지막지한 군화발에 체이고 얻어 터지며
최루탄 가스에 눈물 흘릴 때,
서대문이나 안양, 혹은 광주의 붉은 벽돌집에서
손째 묻은 벽을 바라보며 썩는 세월,
숨막히는 외로움에 몸부림 칠 때
너는 나를 찾아 주지 않았다.
빌라도의 뜰
그 엉터리 재판정에서
그들이 나를 묶어 사형을 선고하고
옷벗기고 침뱉고 욕하며 목조르고 때릴 때
너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마지막 십자가 위에서
희미해진 나의 시선이
혹시나 싶어 아래를 휘둘러 보았을 때에도
너는 거기에 없었다.
그런즉
나는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